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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생각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편인 듯하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찝찝한 일이 있으면 쉽게 떨쳐 내지 못한다. 그 일은 이미 실체 없이 과거 속으로 흘러 내려간 허상에 불과한데도 내 머리가 끄집어 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전두엽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감정과 기억의 생성은 변연계에서 출발하지만 생각의 되새김은 전두엽이 없다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집착은 그 대상이 기억이든, 생각이든, 탐욕이든, 아니면 심지어는 사람이든 근본적으로 ‘놓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다. 집착은 재빨리 추스르지 못하면 가속하는 특성을 갖고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속도를 올릴수록 시야가 좁아지고 위기 대처 능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점을 잘 안다. 시속 40킬로미터로 달릴 때 시야각이 100도 정도인데 반해 시속 100킬로에서는 약 40도로 급격히 좁아진다. 집착에 중독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각이 급격히 좁아지고 합리적 이성이 약해진다.

 

과거의 일, 좋지 않은 기억, 힘들고 우울한 생각이 자꾸 나는 것의 근본 원인도 집착이다. 돈이나 성공, 권력이나 명예욕, 또는 기타 탐욕에 자신도 모르게 매여 사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자신도 그런 자아의 모습을 알아 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야가 무척 좁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쉬면서 성찰하고 명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 나 자신에서 빠져 나와 저 먼 곳으로 올라가 세상과 나, 그리고 내면을 바라보는 관조가 필요하다. 집착하는 나의 모습이 한 없이 초라해 보이고 위태로워 보인다면 무언가 처방전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처방전 중 하나가 ‘방하착(放下着)’에 대한 깨달음이다. ‘방’은 ‘놓는다’는 말이다. ‘하’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와 같은 자아의 마음’을 의미한다. ‘착’은 말 그대로 ‘집착’이다. 즉 내 마음의 모든 집착의 뿌리를 내려 놓는 것이 방하착이다. 심지어는 집착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조차 집착일 수 있다. 방하착은 도대체 집착이란 없는 심연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부처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며 도인 또한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서 방하착의 실현은 그리 가능한 일이라 보지는 않는다. 완벽한 방하착에 이르는 것은 신 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방하착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은 삶에 미치는 지극히 긍정적인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생각에 얽매이는 순간마다, 어떤 대상에 모든 것을 수렴시키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마음 속에 둥지를 트는 집착과 생각을 발견하는 노력, 그리고 그 것들을 곧바로 내려 놓고 자아를 가볍게 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평안하고 풍요로워진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가 방하착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다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도록 노력하기.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유형이든 무형이든,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어떤 대가를 받아야 당연하다는 생각을 버리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당위의 집착에 빠져 타인과 세상에 서운한 감정을 늘 품는다. 억울한 감정이 쌓이면 나만 손해다. 세상은 그런 대가를 약속한 적도 없다.

둘째, 지난 일들을 자꾸 떠올리지 않도록 노력하기. 
안 좋은 기억이라면 이런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생각과 기억에 지배당하면 농도가 자꾸 짙어진다. 때로는 눈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조그마한 단초가 순식간에 수십 배 이상으로 부풀어져 내 정신을 깔아 뭉갤 수 있다. 생각과 기억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두 가지다. 용기가 있다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그 생각과 기억들을 정면에서 대하고 바라보는 것이 한가지요, 다른 하나는 회피 방법으로서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거나 운동 또는 명상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셋째, 결과보다 과정에 가치를 두려고 노력하기.
지나치게 결과에 치중하면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등 이분법적 기준으로 삶을 바라 보게 된다. 인생에서 늘 성공과 승리만 하는 사람은 없다.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면 실패와 패배의 순간 극한의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성공과 승리에만 지나치게 집착해서 정작 중요한 다른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우를 범하기 쉽다.

넷째,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노력하기.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그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나도 믿지 못하고 스스로 기대를 저버리기도 하는데, 남이야 오죽하랴. 타인에 대한 기대는 실망과 원망만 만들 뿐이다. 이는 곧 특정한 타인이나 사회 전체에 대한 집착을 낳고 종국에는 원망과 원한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다섯째,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도록 노력하기.
시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집착은 과거와 미래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붙잡고 놓지 못하는 건 이미 실체가 없는 과거의 산물이거나 아직 존재한 적조차 없는 상상이다. 늘 순간에 깨어 있고 지금에 충실하면 쓸 데 없는 집착이 일 수도 있는 불씨를 완전히 꺼 벌릴 수 있다.

여섯째. 열정과 사랑도 지나치면 걱정이나 불안만큼이나 나를 상하게 함을 늘 되새기도록 노력하기.
열정과 열망은 좋은 것이다. 사랑은 말 할 나위 없다. 움직이게 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힘을 준다. 하지만 좋은 것들도 나쁜 것들만큼이나 과하면 집착이 되어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만들 수 있다. 퀸의 노래 ‘Too Much Love will Kill You’는 과장이나 거짓말이 결코 아니다.

일곱째,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인정하도록 노력하기.
세상은 결코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다. 모든 일은 확률 게임의 굴레에서 맴돈다.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배신하기도 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못된 놈들은 잘만 사는데 착하게만 살던 나는 늘 힘겹기만 하다. 내가 원하던 지금의 내 모습은 결코 이런 게 아니었으며, 건강하던 몸에 이상이 생기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열정과 의지를 갖고 굳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자기계발 서적은 모두 거짓말투성이다. 안 되는 건 분명히 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집착을 내려 놓는 것이다.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의 뇌신경 회로는 가소성이 있어서 자꾸 반복을 하면 회선이 재배치된다. 즉 노력을 하면 생각의 패턴도 신경회로의 재배선을 통해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다. 방하착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삶 속에 뿌리 박고 있던 많은 부정적인 대상들이 뽑혀져 나갈 수 있다. 어느 새 초연해 지고 가벼워진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집착에 빠져 산다. 저마다 대상이나 정도가 다를 뿐 예외를 찾기 힘들다. 집착 자체가 소유의 불가능을 전제로 하기에 극단적인 고통과 괴로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고 도파민이 주는 순간의 짜릿함에 중독되어, 피곤함과 각성 사이에 외줄타기를 하다 어느새 지나쳐 버린 주위의 아름다움과 소소한 행복을 그리워하며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삶이다.

그런 허무한 삶, 고통의 반복되는 삶, 짜증만 자꾸 나는 삶, 기분 나쁜 일들이 자꾸 생각나 우울한 삶이 반복된다면, 방하착을 마음에 새겨 보도록 하자. 우리가 잡고 있는 것은 절벽에 뿌리를 박고 있는 한낱 나뭇가지에 불과하다. 초연하게 내 갈 길을 가면 될 것을 괜한 뿌리를 부여 잡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 Photo by frank mckenna on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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