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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늦은 저녁, 일을 하다가 눈이 피곤해서 잠시 침대에 누웠다. 내 침대에는 큰 베개가 하나 있는데 그걸 안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선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뱃살에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어 깼다. 이내 일어나서 확인해 보니 무려 다섯 곳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상을 보아 하니 분명 뭔가에 물린 자국이었다. 모기 아니면 집진드기가 용의 선상에 올랐다. 재빨리 물파스를 바르고 나서 마저 일을 마치고 잠을 청했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자리들이 꽤 많이 부풀어 올랐다. 벌에 쏘인 것보다는 조금 덜 하지만 꽤 당황스러울 정도의 크기와 색깔이었다. 사실 몇 년 전에도 모기에 물려 다리 한 곳이 그 지경이 된 적이 있었다. 워낙 모기에 잘 물리는 체질이지만 자국이 이런 정도의 증상이 올라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부분이 자꾸 간지럽고 붓기가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외부에 일을 보는 곳 근처에 있는 피부과를 찾아 갔다. 저녁에 우리 동네에 있는 가정의학과를 갈까 하다가, 그래도 피부과를 가면 보다 확실하고 전문적인 진료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찾은 것이다. 대기실에는 원장의 이력과 학회, 협회 등 여러 커리어들을 잔뜩 새겨 놓은 명판이 벽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차례가 되어 원장실을 들어갔다.

원장은 꽤 젊어 보이고 명석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어떤 증상으로 오셨냐는 질문에 이내 복부 피부에 문제가 생겼음을 말하면서 살짝 상의를 올려서 그 자리를 보여줬다. 그리고는 이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하려는 찰나, 그 원장은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내 말을 끊고는 잘 보이게 일어서서 상의를 들어 보라고 했다. 주춤거리면서 일어나서 확인을 시켜 주고는 다시 말을 좀 하려는데 이내 그 원장 왈, ‘대상포진이네, 대상포진.”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 거였다.

일부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단 진료를 보면서 문진을 먼저 하거나 증상을 확인하면서 잘 듣는데 이 원장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내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환자인 나의 문제를 성의를 다해 파악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합리적인 판단 근거를 듣기도 전에 이미 부정적인 편향이 나의 머리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 증상이 어떤 상태에서부터 발생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본인이다. 그리고 나는 대상포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단, 전문가가 아니기에 내가 알고 있는 대상포진 증상이 전형적이긴 하지만 예외일 수도 있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만약 그 원장이 내 말을 경청하고 상세히 관찰한 후에 친절한 설명과 함께 진단을 내려 주었더라면 나는 전혀 거부감이나 의구심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에서 나는 한 사람의 고객으로서 그 병원의 서비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 

안타까운 점은, 상대방의 말을 성의를 다해서 주의 깊게 들어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비즈니스이건 공공적인 행위이건 누군가를 상대하는 사람이나 조직에 있어서 잘 듣는 행위는 기본 중에 기본이요, 가장 저렴하게 고객을 확보하고 충성도를 높이는 길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잘 들어야 고객의 문제를 보다 정확하고 성공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잘 듣지 않는 것은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뿐 아니라 비즈니스의 목적인 고객 문제 해결도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

위의 피부과 원장은 결국 대상포진 같지는 않은 것 같다는 나의 다소 강한 어필에 일반 피부염으로 치료를 한 번 해보자고 하면서 항생제 더미를 안겨 주었다. 이미 나는 신뢰를 갖지 않았기에 그 약을 복용하지 않고 저녁에 우리 집 근처 가정의원에 가서 다시 진료를 받았다. 그 피부과 의사와는 다르게 내 말을 잘 듣고 증상을 자세히 살펴 본 가정의원 원장은 대상포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면서 모기나 벌레 알레르기 증상으로 진단 후 그에 맞는 처방전을 주었다.

약 3일이 지난 오늘 동네 가정의원에서 처방 받은 약을 단 하루치 복용하고는 증상이 거의 없어졌다. 만약 내가 그 피부과 의사의 처방대로 항생제나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랬어도 이 증상은 지금처럼 차도가 있었을 테지만 나는 괜히 부작용이 꽤 심한 편에 속하는 약물들을 감당해 내야 했을 것이다.

기업의 고객은 병원의 환자와 다를 바가 없다. 기업과 병원은 고객과 환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 문제를 해결해 줄 의지가 없거나 방법을 모르거나 그럴 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첫 번째 일은 그 문제가 무엇인지 고객이 이야기하는 것을 최대한 집중해서 상세하게 들어야 한다. 잘 들어야 실수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성공적으로 문제를 풀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왜 소송을 하려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고객의 말을 가로채는 변호사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픈 환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의사도 필요 없고 고객이 원하는 점과 불만사항에 귀 기울이지 않는 회사는 자신들이 왜 존재하는지 다시 한 번 깊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마케팅을 하면서, 우리는 가장 쉬우면서도 기본적이며 비용이 적게 드는 일들을 경시하거나 잊어버리곤 한다. 비용을 들여서 광고를 하고 판촉과 이벤트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세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런 활동들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 Featured Photo by kyle smith on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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