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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꼬리를 내리고 나니 가을 장마라는 손님이 찾아 왔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출근 길 도로 위에 움직임이 굼뜬 차량들이 줄을 이어 가다 서다 하고 있다. 정체를 예감하고 일찍 서둘러서 그런지 바쁘게 내리는 빗줄기와 달리 유진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수색을 지나 연세대 정문 앞에 다다르면서 정체가 조금 심해지는 듯하다. 몇 달에 한 번 광화문 본사에 회의를 들어갈 때면 여지 없이 지나게 되는 연세대는 유진의 모교다. 늘 바쁜 직장 생활 탓에 모교 앞을 지난다고 해서 특별한 느낌을 가진 적은 딱히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물방울이 쓸리는 차창 너머로 비치는 정문의 풍경이 오늘따라 눈에 띈다. 그 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낯 익은 음악이 들려 온다.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이다. 하필이면 왜...

 

유진은 갑자기 차분했던 가슴 저 편에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에는 십 년도 넘은 대학교 시절 그 때 기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열정이 가득했던 그 때, 친구들의 우정과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생각나는 건 이별이었다. 대학 생활 내내 함께 했던 그와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이별했던 기억. 비오던 그 날 정문 앞 건널목 신호등 밑에서 누군가에게 들킬까 고개를 푹 숙인 채 밑으로 자꾸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기만 하던 그 때,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던 노래가 바로 저 노래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세월과, 이젠 번져버려 자국조차 희미해져 버린 기억들과, 오래 빛났었지만 순간의 아픔으로 끝나버린 사랑의 기억이 갑자기 감정과 함께 몰려들었다.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가 아니었다면 유진은 아마 그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을 지도 모른다.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는 앞차 행렬의 꼬리를 따라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는 눈에 살짝 맺혀 있는 이슬 한 방울이 뺨으로 흘러 떨어지는 걸 느꼈다. 


 

 


 

 



한 때 즐겨 듣던 노래를 참 오랜만에 들었을 때 갑자기 그 때의 기억이 문득 올라오는 걸 느낀 경험을 아마 누구나 갖고 있을 거다. 평상시에는 잊고 살았던, 잘 떠오르지 않던 기억들이다. 그 때 기억과 함께 새록새록 감정이 되살아나는 걸 경험하게 된다. 저 편 기억이 나도 모르게 갑자기 그 때의 감정과 함께 떠오르는 건 그 기억이 당시의 정서와 함께 우리 마음 속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바로 ‘정서적 기억(emotional memory)’이다.

정서적 기억은 기쁨, 슬픔, 고통, 행복감, 분노 등 감정등과 연관된 기억을 말한다. 어떤 사건이 우리의 뇌에 기억이 될 때 그 사건을 겪을 당시 느끼는 감정이 함께 기억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그 사건과 정서는 함께 묶여져 기억으로 저장되기 때문에 연상되는 어떤 단서로 인해 그 사건이 잠재기억 밖의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질 때 감정도 함께 인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뇌에서 기억의 저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가 변연계의 ‘해마(hippocampus)’이다. 이 해마는 같은 변연계에 속하는 ‘편도체(amygdala)’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편도체는 감정 중추다. 편도체가 손상되거나 기능을 제대로 못하면 정서 반응에 이상이 생긴다. 소설 ‘아몬드’에서 주인공은 이 편도체의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정서적 반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편도체가 해마와 접해 있다는 것은 뇌 구조적으로도 정서 기억이라는 기능적 발현에 두 기관이 밀접한 협력 관계를 발휘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편도체는 강렬한 경험이 기억될 때 정서라는 옷을 입히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흔히 어떤 과거 장면 인출은 감각적 사건이 단서(cue)가 되어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그 때의 감정과 함께 기억 속 깊은 곳에 저장된 사건이나 장면 등 시각적 자극이나 음악, 목소리 등 청각적 자극, 또는 향기와 같은 후각적 자극들이 기억의 회상을 촉발할 수 있다. 그 기억들은 당시 함께 경험했던 감정과 함께 내현기억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불러 낸다. 

위에 들었던 사례에서 보면, 유진의 모교 앞이라는 장소적 요소와 당시 이별할 때 들었던 음악이 갑자기 그 때의 기억을 강렬하게 소환한다. ‘학교’와 ‘음악’은 정서적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단서로 작용했다. 갑자기 수면 위로 불려 올려진 그 기억은 무미건조하기에 이를 데 없는 단순한 전기적 기억이 아니다. 그 때 그녀가 느꼈던 감정과 감성이 입혀진 기억이다. 이러 기억은 ‘아 그런 기억이 있었지, 맞아’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억과 함께 소환된 감정이 마치 그 때로 돌아 간 듯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그 기억이 슬프면 울컥한 감정이 들고, 행복한 것이었으면 뿌듯한 느낌이 들며, 아프면 마음이 힘들고, 신나는 것이었으면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다.

정서적 기억은 강력하다. 유사한 기억들이 정서적 옷을 입지 않았다면 마음 깊숙한 곳에 저장조차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 역으로 적용해 보면, 기억에 정서를 입히면 보다 효과적이라는 말이 된다. 강렬한 감정이 개입된 경험은 오래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정서적 기억은 우리의 삶에서 종종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서적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경험에 감정이 짝 지워진 것이고 이는 곳 그 경험에 대한 평가의 역할을 수행해 준다. 즉 긍정적 감정이 느껴지는 기억이라면 그 경험은 비교적 좋은 것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고, 반면 부정적 감정이 느껴진다면 그와 비슷한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면 가급적 피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서적 기억이 앞으로 미래에 겪게 될 유사한 경험에 대한 직관적 판단 능력을 제시해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서적 기억은 그 기억이 긍정적인 감정이 수반된 것일 때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입고 있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특히 심한 고통과 함께 저장된 기억은 소환될 때 그 고통마저도 함께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서 이를 극복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심할 때에는 정신과적 치료를 필요로 한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개인이 가진 기억에 의존한다고 한다. 기억이 없으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 수도, 알 수도 없다는 뜻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가진 기억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정서적 기억은 그런 측면에서 나의 정체성 중 정서적 부분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삶 속에서 가급적 긍정적 정서가 입혀진 경험들이 기억으로 많이 남을 수 있다면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정서적 정체성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환경적 요인과 함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의지적 요인에 의해서도 가능한 작업이다.


 

[ Featured Photo by Tore F on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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