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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 최근 일어났던 흉악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와 한참 나누고 난 뒤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보는데 ‘범주’라는 단어가 순간적으로 ‘범죄’로 보였다.

- 옆에 앉아 있는 꼬마 아이의 미소를 보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며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친구가 갑자기 떠올랐다. 놀랍게도 그 아이의 이름도 생각이 났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피자, 쫄면, 햄버거, 라자냐 등의 사진을 보여준 후 약 1분 뒤에 ‘스파’로 시작하는 네 음절의 단어의 뒷부분 두 글자를 채워 넣어 보라고 했다. 요청 받은 세 명 모두 ‘스파게티’라고 대답했다. 다른 세 명에게는 그리스, 로마, 힘 세 보이는 장수, 중세군인 사진을 보여준 후 역시 동일한 요청을 했다. 그랬더니 세 명 중 두 명이 ‘스파르타’라고 대답을 했다. 

똑같이 제시된 미완성 음절에 대해 왜 이렇게 다른 완성조합의 대답들이 나왔을까? 이는 앞서 제시된 자극들의 개념적 범주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즉 첫 번째 경우 음식들이 제시된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중세 남성적 이미지들이었다. 이렇게 앞서 제시된 자극의 개념적 범주가 서로 달라서 각각 그 범주와 연관된 쪽의 단어들이 더욱 쉽고 빠르게 추출된 것이다. 비록 아주 작은 규모의 테스트였지만, 앞서 제시한 이미지들에 의해 단어의 연상 결과가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특정 단어나 사물, 사건, 관념, 개념 등과 같은 자극이 그와 연관된 자극이나 정보 및 다양한 정신적 요소들의 발현에 단속적 또는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심리적 현상을 ‘점화효과(Priming Effect)’라고 한다. 한 마디로, 먼저 보거나 느낀 것에 의해서 그것과 연관된 생각이나 기억들이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더 쉽게 떠오르도록 ‘점화된다’는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보자. 자라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면 심리적으로 자라와 연관된 동물이나 생김새가 비슷한 물체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빨리 지각된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솥뚜껑이 조금 전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자라와 아주 비슷한 모양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눈에 띄게 되고 두려움의 감정까지 촉발하게 만든다. 이는 동일한 류의 시각적 모양, 즉 양태(modality)에 의해 지각적인 점화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점화효과는 의식적으로 발생되지 않는다. 만약 의식적으로 생각해 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억을 해내는 것이지 점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점화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 위에서 예를 든 현상들은 자신이 의도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점화효과는 내현기억(암묵기억, intrinsic memory)에 저장되어 있던 심리적 요소들이 연관 자극에 의해 촉발되어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내현기억은 과거의 어떤 경험이나 학습 등에 의해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말한다. 


점화효과는 기분과 감정을 통해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유명한 존 바그(John Bargh)의 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무의식 전문가인 존 바그 교수는 피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노인과 관련된 단어들을 다양하게 접하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그 그룹의 피험자들은 다른 그룹에 비해 걷는 속도를 비롯한 행동이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지 노인과 관련된 단어들을 접한 것만으로도 행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존 바그의 연구 결과는 서로 다른 양태와 심리적 요소들 간에도 점화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단어나 단순한 사건 하나가 지각을 거쳐 생각과 감정은 물론 행동에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 

마케팅적 관점에서 볼 때 점화효과의 이러한 특성은 광고의 시간적 배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예를 들자면, 신중하고 부정적인 내용의 프로그램 뒤에 상쾌함을 주요 컨셉으로 하는 제품의 광고를 노출하는 것은 광고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요즘 인기 있는 연예인이 긍정적 역할로 출연하는 프로그램 뒤에 그 연예인이 나오는 광고를 배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로 점화효과를 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식품이나 음식 관련 광고를 배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점화효과는 다른 심리적 효과나 현상들과 관련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구분이 좀 애매한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자극에 의해 특정 자극 요소들의 발현이 촉발되는 것과 달리 어떤 자극 요소의 발현은 억제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부적 점화(negative priming)’이라고 한다. 반복 연관 노출 또는 학습 시 점화가 강화되는 것과 달리 부적 점화의 경우에는 표적 자극의 발현이 오히려 더욱 억제된다. 즉, 어떤 자극에 의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무시되는 대상 자극은 그 행위가 반복될수록 더욱 발현이 어려워지게 된다. 


점화효과는 진화적으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앞에서는 자라의 예를 들었지만, 만약 자라가 순식간에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맹수라고 가정해 보자. 자라와 비슷한 것만 봐도 무의식적으로 점화효과가 발생해 두려움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피하게 된다면 생존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만약 점화효과가 의식의 수준에서 느리게 발생하는 것이라면 자존심은 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목숨을 지킬 확률은 꽤 낮아질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무의식적 차원에서의 점화효과의 발생 기제와 신경체계와 구조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상당히 흥미롭고 유용한 발견들을 많이 도출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 ]

Bargh JA, Chen M, Burrows L (August 1996). "Automaticity of social behavior: direct effects of trait construct and stereotype-activation on ac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1 (2): 230–44.

Mayr, S., & Buchner, A. (2007). Negative Priming as a Memory Phenomenon. Zeitschrift Für Psychologie / Journal of Psychology, 215(1), 35–51.

Meyer DE, Schvaneveldt RW (1971). "Facilitation in recognizing pairs of words: Evidence of a dependence between retrieval operations".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90 (2): 227–234.

 

 

 

[ Featured Photo by Devin Avery on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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