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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via flickr by Jentsen ]

트위터를 하다 보면 가끔 의견이 상이한 분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는 합니다. 어제는 모 방송국의 유명 앵커이신 분(이 분도 트위터의 헤비유저 중 한 분이십니다)과 몇 분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벌어졌고 그 중 한 분과는 감정이 상당히 상할 정도의 언쟁이 오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 앵커분은 무려 8만명 이상의 팔로워를 갖고 계신 데 반해 불과 10명도 채 되지 않는 분들께 팔로워를 걸고 계신데, 이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긴 분들이 다소 비판적 트윗을 보낸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곧 그 앵커분께서는 소통의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점일 뿐임을 항변하시며 반박을 하셨고 이 트윗에 대해 많은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 중 일부 다소 과격한 트윗에 감정이 상하신 이 앵커분께서 더 이상 트윗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격앙된 분위기가 연출이 되었습니다.

트위터 유저분들의 의견 제시에 대해 부드럽고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도 너무 단호하고 융통성이 아쉬운 반응을 보이신 그 앵커분이나, 누가 보아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은 정도로 감정적 트윗으로 공격하신 분이나 옳게 처신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앵커분이나 관여된 많은 분들이 소통에 대한 의지나 트윗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서로 서운함과 바램이 표시되고 교차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어느 쪽 의견이 옳고 그른가를 헤아리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다만 중요하게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이 사회와 시대를 살아 가면서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여하를 막론하고 허무하고 가치없게 결말이 나는 종류의 논쟁이 시작되는 원인은 주로 소통의 내용(메시지, 컨텐츠)보다는 의외로 소통의 방법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똑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쌍둥이나 똑같은 공장에서 나온 차도 본질적으로 완벽히 동일할 수는 없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자, 각각의 개성과 차이점을 더 진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하물며 개개인의 생각이야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어느 순간 특정 공간에서 의견을 같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할 수 없으며 아주 스러지기 쉬운 불완전한 형태의 동의에 불과할 뿐 여러 변수들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생각과 의견이 누구에게나 태생적, 역사적, 환경적 변수가 적층되고 퇴적되어 생긴 '입장'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도 가변적인 '입장'에 근거한 의견의 소통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그 차이를 완충하고 소화하는 과정이 수반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해'입니다. 이해는 '납득'이나 '설득'과는 다릅니다. 내 의견이 남과 '다름'을 이해하고 타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행간의 의미까지도 정확히 파악하고 인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납득'이나 '설득'은 두 의견이 거의 '일치'되는 과정을 포함하며 '수용'의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결국 전달자로서는 '수용시킴'을 수용자에게는 '수용당함'을 의미하게 되어 능동과 수동 및 주종의 과정이 암묵적으로 포함되고 인정이 됩니다. 소통의 과정에서 '납득'과 '설득'은 필수가 아니지만 '이해'의 과정은 필수입니다. 이해의 과정을 거쳐야 '오해'의 불씨가 없어지고 보다 열린 자세에서 다른 의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해'라는 선행적 필수 요건의 갖춤을 저해하는 요인은 대부분 '내용'보다는 '방법'에 기인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통의 과정에서 올바르고 효과적이지 않은 소통의 방법은 이해의 과정을 방해하고 이성보다는 감정을 상승시키며 자신의 영역에 대한 방어 기제를 강화시킴으로써 때로는 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심지어는 방법의 문제로 인해 내용 자체의 추가나 변형까지 유도되기도 합니다. 결국 핵심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가리키는 손이 태양을 가리듯 주객이 전도되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드는 허무하고도 비극적인 소통의 결말이 도출되어 버리고는 합니다.

흔히 우리는 서로 의견의 충돌을 빚어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다가 어떤 계기나 분위기 전환에 의해 화기애애한 상황으로 바뀌는 경험을 많이 겪고는 합니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 이해는 하지~'라면서 서로 도닥여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서로의 입장이 바뀐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렇듯 소통의 방법의 차이는 소통의 깊이와 가능성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올바른 소통의 방법을 위한 주요 요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예의범절,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배려심, 자존심을 지켜 주는 매너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의견을 전달할 경우에도 아주 사소한 요소-예를 들면 말실수, 적절치 못한 표현, 오해를 살 만한 단어의 사용, 감정을 상하게 하는 행동 등-들에 의해 논쟁, 나아가서는 싸움으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전혀 합일점을 찾기 힘들어 보이는 상반된 의견을 제시함에 있어서도 건설적이고 훈훈한 토론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기본적 입장이나 서로 전달하려는 내용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탄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이 전술한 소통 방법의 요건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요건들은 다름이 아닌 그 기저에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존중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존중심이 없으면 내용과 말투, 태도 자체에 무시하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기 마련이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정확하고도 깊은 이해가 없으면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는 독단과 오만이 드러나며, 자존심(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을 버리면 의도치 않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구성원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 사이에는 건설적이고 생산적이며 가치 추구적인 소통이 수반됨으로써 더 살기 좋은 세상이 구현됩니다. 그리고 이제 막 그 가능성을 무한하게 넓혀 주기 시작한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께서는 '자유'를 강조하시며 이 곳까지 '규제'와 '룰'을 강요하는 것 아니냐며 일체의 소통의 완전한 자유를 부르짖기도 하십니다. 전혀 틀린 말씀이라 볼 수는 없겠으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우리 모두의 행복이며 선한 대중 대다수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한,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소통에 있어서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 또한 '이해'가 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결국, 적어도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을 생각할 줄 아는 근본적 마음가짐이 핵심입니다. 한계가 없는 교류와 소통과 만남의 장을 열어 주기 시작한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오프라인에서와 같은 무지와 싸움, 갈등, 전쟁 보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성과 화합,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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